(뉴스인020 = 김성길 기자) 적도 아래 위치한 아프리카 작은 나라의 청명한 하늘에 로켓 한발이 햇살을 가르며 비행중인 항공기를 격추시켜 공중에서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비행기에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르완다와 부룬디의 대통령이 탑승하고 있었다. 르완다 상공에서 폭파된 비행기는 두 국가 정상과 탑승원 전원의 시신 조각을 지상으로 흩어놓았다.
1994년 4월 6일, 이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르완다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르완다의 국경은 전면 폐쇄되고 하늘 길도 막혀버린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는 다수(인구의 85%) 후투(Hutu)족은 이 사건의 배후가 소수 투치(Tutsi)족이라 판단하고 100일간의 잔인한 대학살(Genocide)을 시작한다. 정부는 투치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연일 주창하며 모든 후투족들이 이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간다.
방송을 통해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칭하며 이를 없애지 않으면 후투족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며 시작된 살해로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다. 학살에 참여하지 아니하는 후투족도 학살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방송으로 투치족의 이름을 발표하고, 주소, 차량 번호를 공개하며 살해하도록 종용한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하였다. 개인이 집에 소유하고 있거나 정부가 나누어 준 마체테(Machete)라는 칼로 잔인한 학살이 진행된다.
르완다는 1899년부터 독일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세계1차대전 독일의 패망에 따라 1916년 벨기에 식민지가 된다.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주요 인사로 기용 르완다를 통치하였다. 투치족은 왕족 혈통으로 넓은 땅을 소유하고 주로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후투족은 주로 일반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계층이다. 이때부터 후투족은 투치족에게 억압과 통제를 받는다고 느끼기 시작 두 종족의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다수 후투는 1959년 반란을 일으키고 투치의 통치에서 벗어난다. 이로 인해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의 계기가 마련되고 1962년 정식 독립을 하게 되었다. 독립을 전후로 1959년부터 투치족 12만명은 갈등과 충돌을 피하기위해 국경을 함께 하고 있는 이웃 나라인 우간다, 자이레(현 콩고공화국), 부룬디, 탄자니아로 피신하게 된다.
이 당시에도 많은 투치족들이 희생되기도 한다. 1980년대 후반 피신한 투치족은 우간다에 본부를 두고 폴카가메(현 르완다 대통령)가 이끄는 르완다애국전선(RPF: Rwandan Patriotic Fro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RPF는 반군으로의 활동을 하며 1990년에 후투족이 통치하고 있는 르완다를 공격함으로써 두 종족간의 갈등이 극도로 심화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기도 한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어 르완다정부와 RPF반군은 1992년 내전을 멈추기로 하고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당시 대통령은 RFP와 연합정부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군내부의 강경 극렬분자의 평화협정 반대가 심하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 하바리마나(Habyarimana)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엔 은타라미라(Cyprien Ntaryamira)가 평화협정 논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르완다 하늘에 로켓한발이 쏘아 올려지면서 모든 평화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곧 바로 투치족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반군인 RPF는 르완다에서 자행되고 있는 투치에 대한 대학살을 멈추게 하고, 정권을 잡기위해 르완다로 진입하는 공격을 시작하였다. 반군 RPF는 격렬한 전투를 하며 르완다 수도 키갈리를 중심으로 전 지역을 점령에 성공한다.
이에 따라 4월6일 비행기격추사건 이후 100일간 일어난 투치족과 투치족에 협력한 후투족을 포함 100만명 이상의 대학살은 멈춰지고 7월4일 해방의 날을 맞이한다. 이로 인해 투치족은 75%가 학살되었다. 학살을 주도하고 참여한 후투 극렬분자를 포함 200여만명이 주변국가로 피신하였으며 주로 자이레(현 콩고공화국)로 대거 이동하여 현정부 반군단체를 구성하여 반격체제를 갖추며 주둔하고 있었다.
격추된 비행기의 승무원들은 프랑스인이었다. 이에 프랑스는 자국민 승무원의 사망에 대한 책임소재를 RPF 소행으로 판단하고 RPF지도자 폴카가메와 협력자를 국제재판에 세우기 위해 국제체포영장을 발부하는 일이 발생되면서 2006년 르완다와 프랑스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이후 르완다 정부는 제노사이드에 있어서 프랑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조사를 위한 위원회를 두기도 하였다. 프랑스와의 관계는 2009년에 이르러 다시 회복되기는 하였다. 그리고 2007년에는 비행기격추 배후조사를 시작하여 그 조사결과를 군내부의 후투 극렬분자 소행이라는 결론으로 2010년1월에 발표하였다.
르완다는 매년 4월7일을 추모일로 지정하여 각종 추모행사를 진행한다. 르완다에는 전국에 6개의 추모관이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추모관은 Kigali Genocide Memorial로 희생자 25만9천명을 안치하고 있다. 2022년은 28번째 제노사이드 추모(28th Genocide us Commemoration)의 해이다. 국가적 애도행사는 1주일간 4월13일까지 진행된다. 코로나로 인하여 행사형태가 축소되고 조금 변형이 되긴 하였지만 첫째 날 4월7일은 공휴일로 지정하고 키갈리 제노사이드 추모관(Kigali Genocide Memorial)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공식추모행사가 진행된다.
코로나 이전에는 추모행사 후 행진을 하였으나 행진은 하지 않으며, 철야기도는 국립TV방송국을 통해 오후 방송으로 진행한다. 이튿날부터는 관공서등 오전근무를 마치고 각종 추모행사에 참여토록 하고 있다. 4월8일 이후에는 예배당에서 제노사이드 종식 역사에 대한 말씀을 전하기도 한다. 또한 전문가나 학자들은 제노사이드에 대한 언론의 역할과 제노사이드 후유증 극복에 대한 토론을 진행한다.
주요지역에서 희생된 희생자에 대한 헌화도하고, 국제사회의 무관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사도 한다. 당시 공무원도 많이 희생되어 정부 각 부처에서는 당시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애도주간 마지막 날에는 정치인의 희생자가 주로 안치되어있는 레베로추모관에서 정치인 희생자에 대한 봉헌의 시간을 갖는다.
1주일간의 애도주간을 마치면 4월6일 이후 100일간 각 지역별로 애도행사를 진행하고 각 교육기관에서는 제노사이드에 관련한 교육이 진행되며 7월3일에 마치게 된다.
4월 7일 진행된 추모행사에서 폴카가메 대통령은 ‘르완다는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정의로운 대국이다. 크고 강한 나라일지라도 정의롭지 않은 국가가 있다. 그 국가들은 우리 국민 백만 명 이상의 죽음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려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라 전하기도 했다.
1994년 제노사이드 발생당시 전 세계 강대국들의 무관심에 더욱 상처가 깊었던 르완다이다, 수만 명의 여성들이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25세 이하의 희상자가 53.8%이고 여성희생자는 전체의 43.3% 차지하고, 수만 명의 어린이가 고아가 되었다. 200여만 명의 난민이 발생되고 국가 전체는 폐허로 변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잔인한 학살에서 주검의 시신더미에서 살아남은 수많은 생존자들은 국가 지원으로 심리치료를 계속 받고 있기도 하다. 상담치료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국가이다. 르완다는 이제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로 종족 구분하지 않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당시 가해자, 피해자가 모두 추모기간을 계기로 함께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갖고 있다.
이들의 슬픔과 아픔이 모두 사라지려면 몇 세대가 지나야 할지도 모른다. 제노사이드 치유에 대하여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사라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르완다연합대학교 부총장 권혁표